2024 | 09 | 15
23.3℃
USD$ 1,335.3 -0.6
EUR€ 1,479.6 -5.4
JPY¥ 921.8 7.4
CNH¥ 187.6 -0.0
  • 공유

  • 인쇄

  • 텍스트 축소
  • 확대
  • url
    복사

[EBN 칼럼] 노동의 가치

  • 송고 2024.09.02 06:00 | 수정 2024.09.02 06:00
  • 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세상에는 뭐든 한 수 ‘위’인(more better) 사람이 있다. 만들어진다. 그것은 시간과 정성의 몫이다. 시간의 흐름은 세상이 할 일이지만, 정성의 지속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무게다. 수십 년간 어떤 일에 매진하는 사람을 가리켜, 서양에서는 마스터(Master)라고 하고 동양에서는 장인(匠人)이라 호칭한다.


세상은 넓기에 별별 장인이 있지만, 불 피우는 장인도 있고, 매듭을 짓는 장인도 계시고, 죽을 휘젓는 장인도 계시고, 만화를 그리는 장인도 계신다. 그들이 허여한 공력은 최소 수십 년이고, 종국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선다. “시간이 별로 없네,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할 텐데 말야...”(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 교토에 가면 오래된 장어집이 있다. 장어구이를 찾는 손님은 평온하고 시원한 실내로 인도되어, 폭포 정원이 있는 안뜰을 보면서 장어구이 덮밥을 먹을 수 있다. 반시간 줄을 서고 있으면 유리창 안에서 노인장이 숯불에 손으로 장어를 굽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드는데, 일일이 손으로 인사를 하신다. 120년이 넘은 점포에서, 장인은 45년째 장어를 굽고 계신다. 장어구이 장인이 일한다. 그는 무려 45년 동안 매일 일해왔다!

오전 8시 장어를 꿰고 있다. 수백마리 장어가 누워있고, 장인은 이미 장어꼬치 수천 개를 꿰놓았다.


오전 9시. 불을 피워야 한다. 이미 주방 온도는 80도를 넘어섰다. 숯불이 이글거리고 있지만 숯이 가라앉아야 굽는다. 아직 창을 열 때가 아니다. 밖에는 장어구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미 줄을 서고 있다.


장어를 굽는 게 뭐 대수일까? 초벌로 꼬치장어를 센불에 굽고 그것을 손으로 꺼내어 찬물에 식힌다. 그리고 양념을 묻혀 다시금 약불에 굽는다. 천 개 이상의 꼬치를 가지고 계속 반복한다. 점심시간 후까지는 계속 구워야 한다.


몇 시간을 쉬고 또 밤늦게까지 굽기 시작한다. 본래 장어굽기 장인이 따로 하는 일은 없다. 신메뉴를 정하거나 손님을 맞이하거나 정작 다른 요리를 만들 수도 없다. 오로지 불에 장어만 굽는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 장어구이 장인이 궁금하다.


밀려드는 인파 덕분에, 인터뷰는 그 공간에서만 진행한다. 장인은 애초에 따로 다른 곳에서 진행할 생각이 없다. 뜨거운 열 속에서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정말 열심히 하시는데요, 장어를 좋아하십니까?”


장인은 답한다. “저는 일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장어요리를 좋아하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나아가 장인은 “장어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일을 주어서 감사할 뿐이죠. 그분들이 요리에 기뻐하고 그 기쁜 마음으로 일을 주시니까요”라고 한다.


장인은 또 말한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일할 수 있고 당신께 감사합니다. (장어를 좋아하는) 당신이 나에게 계속 일을 줍니다. 당신은 나를 고맙게 합니다.”


이쯤 되면 뭐 인터뷰가 계속 ‘같은’ 말이다. 정말(本当ほんとう·本當) 한결같다. 장인은 어눌하고 뭐 달리하실 말씀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참 진실(真実)되다!


장인은 이렇게 말을 끝맺는다. “나는 성실히 감사히 일합니다. 감사히 생각하고 정성껏 일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와 일하고 싶어 합니다. 이제 우리 동료가 되었죠.”


이제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일을 가치 있게 하는 비결이 뭡니까?” 장인은 답했다. “당신의 일에 당신의 마음을 담으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일을 주고, 일하는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한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당연하고 수수하지만 참으로 무거운 성찰을 가져오는 문답이다. 어떠한 논리와 실증보다도, 45년을 이어온 현장 근로자의 목소리는 크고 웅장하다. 노동이라는 것이 수단이나 재화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유가치한 공공재, 가치재로서 영존한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준다.


다시금 노동의 가치를 생각한다. 왜 한 사람의 노동이 그 사람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종종) 누군가는 왜 죽음으로부터 일을 놓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지, 노동을 통해 세상 누군가와 계속 소통하고 있는지 등을 알고 싶어진다. 숯불을 피우고 장어를 굽는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방망이 깎는 노인’의 허리 숙인 모습을 본다. 일의 가치, 노동의 가치, 일하는 사람의 가치를 함축하는 일례가 아닐까 한다.


이제껏 노동에 관한 논쟁은 유구히 반복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노동단체는 소비에트 혁명으로 봉건제국을 붕괴시켰고, 역사상 최초의 노동당은 결국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킨다. 공상과 이념 속에 노동이 존재했고, 구호와 공허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이론상 노동의 목적 노동의 존재 이유는, 생계의 유지(생계유지설), 자아 형성 및 자기 계발(자아실현설), 사회적 가치 실현(사회가치설) 등이라고 하지만, 어느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역사를 통틀어, ‘노동은 형벌이다’, ‘노동은 돈이다’, ‘노동은 행복이다’, ‘노동은 여유(여가)다’, ‘노동은 평화(해방)다’, ‘노동은 혁명이다’ 등등 여러 선인(先人)들이 평가하였지만 그 또한 어느 하나만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이처럼,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성경), 노동하는 것은 노예의 몫(로마법)이라는 생각은 노동이 특정계급의 전유물이고 재화의 사회적 배분이 왜곡되었을 경우에 성립할 수 있는 논리들이다.


노동이 자아실현을 위하여 필수적이라거나(헤겔), 노동은 생계를 위한 부득이한 수단(니체, 쇼펜하우어)이라거나 사회가 노동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재화(마르크스) 등의 논리들도 21세기 사회에 들어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답습적인 면이 있다.


정작 현장에서 노동에 헌신하고 노동을 다듬는 장인의 존재를 무시했달까. 노동이 궁극에 달한 사례들에서 노동의 가치를 찾는 데는 등한시했달까. 수천 년간 동서고금의 장인들이 노동 현장을 지키면서 노동계의 성인(聖人)으로서 대물림되는 것에서 인류는 어떠한 노동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가.


장어구이 장인의 사례만 가지고도, 우리는 노동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게 된다. 궁극적으로 노동의 목적과 노동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노동 그 자체에 푹 빠져있는 장인급 클래스의 근로자에게는 노동이라는 것에 ‘감사함’과 ‘성실함’을 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하면서 답한다.


누군가가 “왜 일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성심껏 일하는 것에 감사하다”라고 답하면서 다시 일한다. 이처럼 동어반복의 이상한(?) 문답은 마치 그들이 ‘노동에 관하여 묻지 말라’, ‘단지 노동을 지켜보라’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마스터와 장인. 노동계의 훈장을 받아 마땅한 그들은 노동에 대한 사회규범적 인식이 희박하다. 그들은 (사회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할 정도로) 노동이 ‘권리’라거나, (사회가 나에게 응당 명령해야 할 정도로) 노동이 ‘의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철저하고 자연스럽게 노동을 ‘권리’이자 ‘의무’로 만들어 버린다. 노동과 노동자가 사회(세상), 구성원(사람)들에게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일터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준다.


마스터와 장인들은 설명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노동의 성역(聖役)을 실현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조금 더 능숙하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내 일을 통해 자신을 새삼 발견한다. 그리고 세상이 나에게 일을 주는 것에 감사하다”라고 말이다.


노동의 궁극(窮極)에 다다른 성역(聖域)에서 노동은 그 자체의 의미를 발산한다. 이들에게, 노동의 가치는 그 자체로 독립하여 존재하고 인간의 삶과 완전히 유리될 수 없으며 노동은 사회가 소통하는 창구로서 당당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구에 있어 물과 공기가 영속하고 영속해야 한다면, 세상에 있어 인간과 노동은 영속하고 영속해야만 한다. 반복되고 힘겨운 노동에 이어지는 자유로운 안식은 단순히 휴식이거나 재노동을 위한 쉼이 아니라, 인류에게는 노동과 여가가 공존하는 삶(아리스토텔레스)이 엄숙히 존재한다.


이처럼 노동과 여가, 그리고 인생이라는 세바퀴 축으로도 노동은 신성시될 수 있고, 노동에 전념하는 근로자는 참된 존재 이유가 있다. 장인(匠人)처럼, 노동의 궁극에 달하는 단계에서, 노동의 성스러운 역할은 성스러운 삶의 일부가 된다.


노동은 그런 것이다. 세상과 사람을 지탱하는 기둥! 인간을 성스럽게 하는 힘! 노동의 가치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주) EB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체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EBN 미래를 보는 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