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 09 | 17
23.3℃
USD$ 1,335.3 -0.6
EUR€ 1,479.6 -5.4
JPY¥ 921.8 7.4
CNH¥ 187.6 -0.0
  • 공유

  • 인쇄

  • 텍스트 축소
  • 확대
  • url
    복사

[EBN 칼럼] 노동요, 노동주

  • 송고 2024.03.28 06:00 | 수정 2024.04.02 08:59
  • EBN 유재원 외부기고자 ()

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유재원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대표변호사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동안 유행했던 광고 카피다. 실제로 이 카드 금융회사는 직원들에게 포상으로 장기휴가, 해외출장 등을 장려, 후원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떠나는 것’ 말고, 노동현장을 함께 해 온 친구들이 있다.


오늘도 우리 근로자들은 또다시 고단한 하루를 끝냈다.


TV를 켜면, 땀 흘려 일하고 난 뒤 퇴근길에 접하는 맥주 한 잔의 광고가 흔한 풍정(風情)으로 그려진다. 소주 광고에는 ‘직장 내의 갈등과 피로를 풀라는 듯이’ 누구나 즐기는 회식(會食)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과거에 대통령들께서는 손수 모내기와 추수에 가서 농주(農酒)라면서 막걸리에 새참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우리네 노동현장의 힘겨움과 피로감을 한방에 풀 수 있는 모임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노동현장에서 술(酒)은 빠질 수 없는 위로와 해방의 매개체다.


또 있다. 노동에는 노동요가 있다. 단순히 길거리에 시위로 나선 사람들이 ‘투쟁’과 ‘사회변혁’, ‘노동해방’을 외치는 노동가(勞動歌)는 아니다.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되게 그 노동현장에서 같이 즐기고 웃고 우는 가락과 소리들이다.


우리나라 근대화 이전, 농업, 어업 등이 번성했던 지난 20년 전까지만 해도 농어업의 현장에서는 ‘멸치 터는 소리’, ‘보리타작 소리’, ‘모내기 타령’ 등등이 불렸고 심지어 동네 사람들이 동네 어르신 상여를 장지(葬地)로 모시면서도 힘든 산길을 ‘상여소리’로 올랐었다.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힘든 노역을 마치면 동네에서는 ‘마당 깊은 집’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판소리나 민요를 불러대는 풍경도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을 터다. 우리네 한국인들에게 노동현장에서 노래는 하나의 놀이임과 동시에 노동의 아픔과 고통을 잊게 하는 치료약이었고, 노동현장 후에는 술과 가락이 어울려 사람들에게 고난하고 반복적인 삶의 무게를 덜어내 주는 역할을 하곤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두레와 품앗이가 흔했던 노동현장에는 노동요가 필요했고 노동을 하던 중에 술 한잔을 나누거나 노동을 마치고 술 한잔하는 것은 흔했다. 심지어 산업화, 근대화가 되는 60년대, 70년대에도 대한민국의 근로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근로의 환경에서도 악착같이 임금을 저축하면서 굳건히 노동현장을 지켰다.


그 현장에서 근로자들은 자생이 즐거운 노동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몸짓들을 하였는데, 지속적으로 노동주와 노동요는 다시금 변화한다. 한때 장마당의 탁주사발과 민요가락은 도심 속 불고기집-대폿집으로 변천하면서 대한민국의 옛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이후 80~90년대에는 회식자리와 노래방으로 진화하였고, 2000년대 이후에는 노동현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삼삼오오 모여 차분하고 아늑하면서도 개인 취향들을 존중하는 모임터로 변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2024년 현재. 직장에서 노동주와 노동요를 찾기는 어렵다.


물론 일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활용하기에는 노동현장이 무척 바뀌었다. 일을 끝낸 후에도 모임은 어렵다. 예전처럼 퇴근 후에 수십명이 어울려서 술자리와 노래 자리는 만드는 것도 아예 생소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회식은 근무의 연장’, ‘2차 노래방 필참’이라는 말들은 이젠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쓸 태세다.


근로시간은 짧아지고 있으며 휴게(휴가, 휴식)권은 적절하게 보장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노동이라는 것은 우리네 삶과 동의어가 아니며 노동에서 받는 고통은 술이나 노래 따위(?)로 푸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런 리프레시의 기회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소중히 기회를 써야 한다는 것이지, 직장사람들이 다시금 모여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도 물론 있다.


이처럼, 시대가 변했고, 노동이 변화했으며, 노동현장도 바뀌었다. 더 이상 노동주, 노동요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고 본다. 완력이 필요한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고 집단적으로 함께 하나의 일을 하는 일터가 사라지고 있으므로, 그런 노동요나 노동요가 필요해지지 않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노동요와 노동가의 가치는 따로 있다. 노동현장의 친구(親舊)들이 유구하게 변천하면서 계속 존재했던 이유는, 대한민국 근로자들이 여러 다양한 노동현장에서도 화합과 공생, 그리고 번영을 꿈꾸면서 기쁨을 두배로 하고 슬픔을 나누며 동료들을 아껴왔다는 점에 있다. 산업화를 이루어낸 그들은 힐링하고 상생하는 기회를 그 두 친구들과 만들어 보려고 했었다.


‘고독한 미식가’라는 만화작품에서는 부지런히 일한 세일즈맨이 식당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시간과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배를 채울 때, 그는 제멋대로 되어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고고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힐링이라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회의 성취는 숨가쁜 노동의 현장들의 금자탑(金字塔)이었다. 일터에서, 일을 끝낸 후, 근로자들이 술을 나누는 모습들, 노래를 부르며 흥에 젖는 모습들은 과거 세대의 옛 풍경들이겠지만, 그들이 노동 현장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자유롭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는 자긍심을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노동요와 노동주에 담겨 있었던 근로자들의 그 감흥은,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수많은 근로자들이 자유로워지고 방해받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평등히 누리는 최고의 ‘힐링’이었다 본다.



©(주) EB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체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EBN 미래를 보는 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