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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中 접경지 탐방③] "동북아 심장 ‘만주’는 고구려 무대·우리 영토"

  • 송고 2024.08.11 17:37 | 수정 2024.08.13 11:38
  • EBN 김남희 기자 (nina@ebn.co.kr)

식량 안보 강조한 중국 정부, 인민들에 옥수수 농사 권장

광개토대왕릉비 통해 고구려 전성기·역동적 활약상 검증

학계 "만주와 요동 벌판, 분명 우리 영토, 고구려 주무대"

만포·삼수군·김형직군·김정숙군 등 개마고원 마을 조망


중국은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 밭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광활하고 푸른 옥수수 대평원. ⓒEBN 김남희 기자

중국은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 밭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광활하고 푸른 옥수수 대평원. ⓒEBN 김남희 기자

국경은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다. 세계·국가·지역 권력이 등장하고 힘을 겨루는 선(line)이다. 최근의 국경은 단절에서 교류의 ‘접경공간(Contact Zone)’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한반도·동북아 정세는 위태롭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평온하다. 1334㎞에 걸친 이 두 강은 오랜 세월 이곳의 생명들을 먹여 기르고 있다. 밤이면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네온사인이 가득한 중국, 무채색 북한이 극적으로 대비됐지만 아침이면 어김없이 생명이 피어난다. 6박7일간 2200㎞에 이르는 조중국경 지역을 다녀온 이야기다.[편집자주]


역사학계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시대의 무대였던 만주와 요동 벌판은 분명 우리 영토였다. 중국 중원지대 하남성~산동성~북경부근~몽고부근~만주대륙 지역은 고조선·동이·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살던 곳이다. 사진은 광개토대왕릉비 전시관의 고구려를 상징하는 그림.ⓒEBN 김남희 기자

역사학계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시대의 무대였던 만주와 요동 벌판은 분명 우리 영토였다. 중국 중원지대 하남성~산동성~북경부근~몽고부근~만주대륙 지역은 고조선·동이·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살던 곳이다. 사진은 광개토대왕릉비 전시관의 고구려를 상징하는 그림.ⓒEBN 김남희 기자

[중국(지안·장백현)=김남희] "여행은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작가 이영하)


이 여행을 떠나기 전 우연히 본 잡지에 있던 문장이다. 짐을 싸면서 이번 조중 접경 탐방 때야 말로 '현존'으로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른바 '마음공부' 영역에서 현존은 '이 순간 지금 여기에 머물기'를 말한다.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금 이 순간'을 여행 때만큼은 만끽하겠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했다.


조식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고구려를 만나는 날이다. 광개토대왕비와 왕릉을 향해 버스는 지안이라는 도시로 향했다.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미국에선 이를 콘 벨트(Corn Belt)라 부른단다.


중국은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 밭으로 유명하다. 광활하고 푸른 옥수수 대평원을 바라보니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실화여서 더 아프게 다가오는 옥수수밭이다. 유튜버이기도 한 탈북여성 A의 이야기.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난 A는 10번을 북송 당한 기구한 운명을 감당해냈다. 중국에서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됐다. A는 중국인 남성의 아내로 팔려갔고 탈출 시도 끝에 어렵사리 아카시아나무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을 갔다.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 깡촌으로 끌려온 탓에 다시 그들에게 잡히는 건 시간 문제였다. A는 깊고 광활한 옥수수밭 아래 숨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신이 있다면, 신께 내 운명을 모두 맡기겠다.'고.


깊은 밤 그녀를 찾는 사람들의 소동이 조용해지자 그녀는 달빛에 의지해 걷고 또 걸었다. 아침이 되어 그녀를 신고하려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던 중 그 동네 한 여성이 차를 태워줬다. 고속도로를 달려 역에 도착한 여성은 A에게 멀리 떠날 수 있도록 기차표와 먹거리를 건넸다. 그 중국 여성의 말은 한 문장이었다. "나에게 너 만한 여동생이 있다"고.


중국의 옥수수밭.ⓒEBN 김남희 기자

중국의 옥수수밭.ⓒEBN 김남희 기자

중국의 옥수수밭은 14억 인구의 숙명적(?) 농사다. 노는땅으로 돈을 벌 수 있어서다. 중국 정부는 식량안보를 강조하며 인민들에게 옥수수 농사를 권장한다. 추수를 하면 정부가 값을 쳐서 사준다.


그런 이유로 인민들이 밥 먹듯이 짓는 농사가 옥수수다. 유전자변형(GM) 옥수수 실험 농사 차원이라는 말도 있지만 옥수수는 활용성이 높다. 가축 사료가 되고 바이오 에탄올 등 신재생 연료를 만들 수 있어서다.


중국 당국은 자본주의를 적절히 정책에 배합해 관광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실물로 본 광개토대왕릉비는 방탄유리 전시관(비각) 속에서 보존돼 있었다. 다만 당국 측 관리자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391-412)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사후 왕릉 보존을 위해 세운 비다. 18세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39세에 죽었다.


비는 왕이 죽은 지 2년째 되는 해인 414년 9월 29일에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세웠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과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가 정세를 보여주는 내용들이 담겼다. 높이는 6.34m 가량 되며 폭은 1.35m~2m, 무게는 37톤에 달한다.


중국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연합뉴스

중국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연합뉴스

채석(採石)하고 난 몸돌을 적당히 여기저기 다듬었을 뿐 네모반듯하지는 않았다. 거대한 4면(面)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 정식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 비를 ‘호태왕비(好太王碑)’, 또는 ‘영락대왕비(永樂太王碑)’라고도 한다.


비문은 3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 국가의 건국신화를 기록하고 나아가 시조왕을 비롯한 광개토왕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둘째 부분에는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수행했던 정복활동의 내용과 그 성과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을 비롯한 그 이전 고구려 역대 왕들의 능을 안전하게 수호하기 위해 기존의 수묘제(守墓制)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왕들의 출신지 등이 적혔다.


학계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시대의 무대였던 만주와 요동 벌판은 분명 우리 영토였다. 중국 중원지대 하남성~산동성~북경부근~몽골부근~만주대륙 지역은 고조선·동이·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살던 곳이다.


요동·요하·봉황·봉천·관전·홍경·회인·통화·개헌·길림·연길·용강·회춘·홍안·위원·관동·빈강·안동지역 모두가 우리 영토였고 조선족들이 이어 살고 있다. 활로 매번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한국에 한 외신이 "고구려 때부터 한국인이 활 잘 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라고 물었다고 한 기사가 떠올랐다.


사실 광개토대왕비는 무성한 들판에 반쯤 박혀있는 채로 발견됐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던 옥수수 평원 옆 바위에 불과했다. 1800년대 중반 지역 농민 혹은 관공서 직원에 의해 발견된 후 중국 문물국 소속 학자들이 찾아왔다고 알려진다. 그렇게 중국 대륙과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의 비문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광개토대왕릉비 일대 지역.ⓒEBN 김남희 기자

광개토대왕릉비 일대 지역.ⓒEBN 김남희 기자

광개토대왕릉비 일대 지역. 학계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시대의 무대였던 만주와 요동 벌판은 분명 우리 영토였다. 중국 중원지대 하남성~산동성~북경부근~몽고부근~만주대륙 지역은 고조선·동이·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살던 곳이다. 요동·요하·봉황·봉천·관전·홍경·회인·통화·개헌·길림·연길·용강·회춘·홍안·위원·관동·빈강·안동지역 모두가 우리 영토였고 조선족들이 이어 살고 있다. ⓒEBN 김남희 기자

광개토대왕릉비 일대 지역. 학계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시대의 무대였던 만주와 요동 벌판은 분명 우리 영토였다. 중국 중원지대 하남성~산동성~북경부근~몽고부근~만주대륙 지역은 고조선·동이·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살던 곳이다. 요동·요하·봉황·봉천·관전·홍경·회인·통화·개헌·길림·연길·용강·회춘·홍안·위원·관동·빈강·안동지역 모두가 우리 영토였고 조선족들이 이어 살고 있다. ⓒEBN 김남희 기자

예서체로 기록한 비문들 일부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선 신채호, 최남선, 이진희, 임창순 등이 연구해왔다. 광개토대왕릉도 동네 아이들이 뛰어놀던 학교 앞에서 발견된 사연이 있다. 바위들이 피라미드 형태로 차곡차곡 쌓여져 '아시아의 피라미드'란 별칭이 있다. 높은 산과 숲, 언덕으로 둘러싸인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주변을 보니 대륙을 누비던 고구려 전성기가 그려졌다.


학계에 따르면 고구려는 건국 처음부터 기세등등했던 것은 아니었다. 백제와 신라보다 가장 먼저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았음에도 한반도 북부에 자리 잡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중국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다른 민족과 대립하느라 내치(나라 안을 다스림)에 힘쓸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광개토대왕릉 전경.ⓒ연합뉴스

광개토대왕릉 전경.ⓒ연합뉴스

고구려의 큰 적은 백제였다. 광개토대왕은 집권하자마자 할아버지(고국원왕)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로 쳐들어갔다. 한강 이북까지 차지했다. 북쪽으로는 만주와 요동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얼마나 넓은 땅을 개척했으면 이름 자체가 넓을 광, 개척할 개, 토지 토 를 써서 광개토대왕일까.


놀랍게도 신라인들도 광개토대왕의 ‘찐팬’이 됐다. 광개토태왕이 신라의 SOS를 받고 경북 경주에 침입한 일본을 물리쳐서다. 신라유물 호우명 그릇엔 '광개토왕을 기리며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 써 있다.


만포 철교.ⓒEBN 김남희 기자

만포 철교.ⓒEBN 김남희 기자

압록강을 옆에 두고 버스가 달린다. 압록강 건너편은 북한 자강도 만포시다. 지난해 8월 북한무역 선전잡지 '대외무역' 3호에는 만포경제개발구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이곳이 현대농업, 관광휴양, 대외무역을 중심으로 한 종합 경제개발구 건설을 목적으로 하며, 수자원 등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최적화돼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언론은 이 기사를 코로나 팬데믹으로 닫았던 국경을 다시 개방할 수 있다는 신호로 봤다.


압록강 중류에 있는 중국 지안은 대표적인 북중 교역지다. 2019년에는 만포와 지안을 잇는 다리가 정식 개통했다. 만포철교도 있다. 일제가 1939년 만포선과 메이지선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했다.


온라인 백과사전 나무위키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유의사항을 이렇게 적어 놨다. '이 지역은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북 위험이 있으며 월북 문제도 있어서 절대로 북한 쪽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김형직군으로 추정되는 북한 마을.ⓒEBN 김남희 기자

김형직군으로 추정되는 북한 마을.ⓒEBN 김남희 기자

두 번째로 맞이하는 공안이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이드가 일행들의 여권을 모두 모아 공안에게 건넸다. 공안은 버스에 올라타 여권과 여권 주인의 얼굴을 비교했고, 직업과 직장명을 기록했다. 수십분이 흘렀을까. 끝난 후엔 공안이 우리의 버스를 뒤따라왔다. 오늘의 도착예정지 장백현 숙소까지 수 시간 동안.


장백현까지 가는 길은 압록강 너머로 다양한 마을이 등장했다. 량강도(양강도) 삼수군이 나타났다. 옆 동네 갑산군과 묶여서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유명한 산동네다. 한반도 개마고원의 끝자락인 이곳은 발해가 망하고 나선 이성계가 선조 땅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북진을 하기 전까지는 야인이 차지했단다.


한 탈북자는 삼수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유배지로 활용됐고 유배를 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화가 윤선도가 5년을 버티다 타지로 이동됐고,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인 시인 백석이 삼수군에서 30년을 살았다.


'김형직군(金亨稷郡)'이다. 본래 후창군(厚昌郡)이었으나, 1988년 김일성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김형직군으로 개칭됐다. 평균 고도가 1000m에 가까운 산악 지대며 목재 가공업이 주산업이다. 짙은 회색빛 공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일성 고향을 두고 역사가들이 설왕설래한다. 옛 소련 하바로스크란 설이 있고 북한 평안남도란 얘기가 있다. 1920년생인 김형석(철학과) 연세대 명예교수는 평안남도 대동 출신으로 김일성을 '동네 동생'으로 기억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기밀해제 문서는 김일성의 본명을 김성주라고 했다. CIA는 "김일성이 영특하지도 않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게릴라군 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스탈린에게 높은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스탈린과 김성주는 한반도의 공산화의 주역으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량강도 북한 마을. 선전마을로 추정된다. ⓒEBN 김남희 기자

량강도 북한 마을. 선전마을로 추정된다. ⓒEBN 김남희 기자

북한 량강도 선전마을ⓒEBN 김남희 기자

북한 량강도 선전마을ⓒEBN 김남희 기자

북한 량강도 선전마을ⓒEBN 김남희 기자

북한 량강도 선전마을ⓒEBN 김남희 기자

김형직군에 이웃해있는 김정숙군이다. 역시 김일성 처의 이름을 딴 군이다. 옛 이름은 신파군으로 개마고원의 북부 지대다. 김형직군보다 훨씬 고급스런 주택들이 많아 보였다. 수력 발전과 식품가공업이 주산업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와 함께 북한 선전마을이 나타났다. 선전마을은 말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동네다. 깔끔하고 단정한 형태의 살림집이 모여 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런 선전마을에는 원칙적으로 주민들을 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북한 김정숙군. 김일성 처의 이름을 딴 군이다. 옛 이름은 신파군으로 개마고원의 북부 지대다. 기차역이 있다. ⓒ EBN 김남희 기자

북한 김정숙군. 김일성 처의 이름을 딴 군이다. 옛 이름은 신파군으로 개마고원의 북부 지대다. 기차역이 있다. ⓒ EBN 김남희 기자

외부인에 북한을 보여주기 위해 접경지역 교통 요지에 그럴듯하게 지어 놓았을 뿐이란 얘기다. 봄 모내기철과 가을 추수철이 되면 농사를 짓기 위해 외지주민들을 동원해 일을 시킨 뒤, 일이 끝나면 다시 철수하는 식으로 이뤄진다는 얘기가 있다. '내 나라 제일로 좋아!'란 선전문구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한국에서의 일상에선 초소를 자주 볼 일이 없다. 동네마다 있는 경찰 초소와 파출소 정도다. 하지만 북한에선 크고 작은 감시 초소들이 편의점만큼이나 즐비했다. 예전엔 1층짜리였지만 탈북자가 많아진 2000년 이후엔 2층짜리 초소가 지어졌다. 국경지역이라 초소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압록강과 매일 함께한 이번 여행의 '기본값'은 옥수수밭과 초소다. 정작 북한 주민들은 평소 민간인 대상으로 도둑질을 일삼는 군인들을 곱지 않게 본다고 한다.


저녁께 북한 혜산시.ⓒEBN 김남희 기자

저녁께 북한 혜산시.ⓒEBN 김남희 기자

저녁이 되어 혜산시에 도착했다. 압록강이 실개천 수준으로 낮고 좁아져 탈북자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고 한다. 가장 궁금했던 도시다. 도시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해서다. 산의 혜택을 많이 보는 도시라는 뜻이란다. 혜산시는 백두산 관광의 관문이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혜산시의 풍경은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낡은 집과 잿빛 지붕의 집.


기자는 어린 시절 지방의 도시 변두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에 대한 기억이 있다. 지금은 1급 발암물질로 지정된 주택 소재다.


가이드는 "내일 아침 숙소 맞은편으로 산책을 가면 혜산시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저녁 7시 정도 됐지만 혜산시의 가로등은 희미했다. 한국의 24시간 영업문화와 달리 북한은 해가 지면 침묵하는 나라다. 북한 특유의 회색 건물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살구색 저층 아파트와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살림집은 불빛이 켜진 곳보다 꺼진 곳이 더 많았다. 사람이 사는 도시가 맞나 싶었다.


혜산시 살림집.ⓒEBN 김남희 기자

혜산시 살림집.ⓒEBN 김남희 기자

혜산 통상구(검문소)로 중국에서 혜산시로 들어가는 '대동강맥주' 트럭이 나타났다. 10톤 트럭이었다. 코로나 이후 북한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대형 트럭 5대, 많은 날에도 10대 정도가 북한에 넘어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언론에 따르면 북중 무역은 지난 2022년 말 중국이 제로코로나 정책을 마무리하면서 빠르게 회복했다. 중국 세관 당국은 코로나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바닷길인 남포와 철도에 의한 북서부 신의주의 두 통상구에 집중돼 있다. 다른 지역에서 무역 개방이 활성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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