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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N 칼럼] 가해자의 시간을 견뎌야 할 때

  • 송고 2023.04.03 06:00 | 수정 2023.04.03 06:00
  • EBN 관리자 (gddjrh2@naver.com)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EBN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EBN

삶에는 멈춤이 없다. 정지화면 같은 무덤덤한 일상을 사는 듯 보이는 사람들도, 남들이 모르는 자기만의 지옥에서 부서지는 마음과 녹아내리는 육신의 고단함을 버티기 위해 쉼 없이 발버둥 치며 간당간당한 하루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생존의 발버둥은 대체로 외부에서 파악할 수 없는 물 밑 깊은 곳에서 필사적으로 진행되기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처럼“나의 고단함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는 지침을 받들며, 타인은 끝내 알지 못하는 음소거의 고립적인 각개전투를 지속해 나간다.


죽기 전까지는 휴전과 종전 없는 전쟁 같은 삶에서, 그나마 지친 심신을 보살펴주고 전력을 보급해주는 변함없는 지원군이 가족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가족은 일생을 두고 맞서야할 가장 큰 삶의 시련이자 고통이기도 하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의 삶에 가장 가혹한 폭력을 행사한 첫 번째 가해자가 그녀의 모친이었던 것처럼, 가정이라는 고립적이고 분리된 공간 안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혹은 드러낼 수 없는 폭력과 학대를 경험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부모와 배우자가 행하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정서적 학대,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당연히 나를 보호해야 할 이들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 주는 좌절감과 절망감에서 연원한다. 궁극적으로는 보호자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유기되거나 가해를 입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책임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피해자 본인과 주변인들에게 스멀스멀 생겨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상황에 놓였을까 하는 답 없는 질문을 무한히 반복하다가 끝내는 스스로의 인간적 가치와 인격적 존엄을 의심하며 존재의 위기에 직면하고, 주변인들은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그랬을 것이라며 가해의 타당한 명분을 찾거나 그래도 가족인데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가해자와의 타협을 종용한다.


가해자가 가해를 행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피해자에게 있다는 기묘한 논리가 등장하면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위치가 바뀐다. 가해자는 가해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면죄부를 받고, 피해자는 가해를 행할 만큼의 잘못이 있었다고 주홍글씨를 달고 비난 받는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전도되는 불합리와 부당함은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로 가던 여객선이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이 사망했을 때나 2022년 10월 29일 할로윈을 즐기려다 159명이 압사한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짧은 비통과 애도를 끝으로 서둘러 피해자 유가족들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타협해주기를 사회적으로 강요해 왔다.


유가족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며, 얼마를 더 받아야 만족하겠느냐는 말들로 피해자들의 상실감과 좌절감을 더욱 극한으로 내모는 데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참하기도 했다. 가정폭력이 묻히는 이유와 같은 맥락으로, 나의 평안하고 일상적인 삶을 위해서 피해자들이 이제 그만 조용히 입 다물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이런 사례는 국가적 단위에서도 발생한다. 35년간 주권을 침탈당한 탓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징용과 징병, 정신대로 강제동원 되었다. 많은 이들이 강제동원 현지에서 죽거나 다쳤고, 살아 돌아온 이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78년이 되었지만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아직까지 일본 정부의 사과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나라 정부는 자국 국민들의 피해보상과 권리보호를 위해 지난 78년간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965년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 지원을 조건으로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한·일 청구권 협정’을 체결했다. 일본 정부는 이 협정으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도 함께 소멸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난 2018년 10월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여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사송에서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며 일본제철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과 미불임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한국 사법부의 이 같은 판결에 일본 정부는 배상 대신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의 수출 제한으로 응수했고, 일본의 무역 보복에 한국 국민들은 “No Japan”을 외치며 일본 제품 불매 운동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지난 5년간 한·일 관계는 적어도 국가 간 정치·외교에서는 출로 없는 냉각된 시간을 보냈다. 정부가 바뀌면서 이제 다시 한·미·일 안보 공조라는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할 당위적 필요가 제기되었고, 드디어 지난 3월 16일 한·일 정상회담이 도쿄에서 진행되었다.


모처럼 양국 정상 간에 화기애애한 모습이 연출되었고, 이번 회담으로 미래지향적 국제 협력의 물꼬가 트였다는 평가도 크지만, 불법적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사실 인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매달리며 구걸하는 외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의 사실 인정과 사과 없는 배상금 대납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 중인 기시다 내각이 처한 “일본 내부의 정치 지형을 고려해야 한다”며 가해자와의 합의를 종용하는 국가 안보실 차장의 발언은,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과 권리보다 일본정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우선해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부모가 자식의 보호자여야 하는 것처럼 국가는 국민의 보호자여야 한다. 그러나 보호자가 직접적인 가해자이거나 혹은 현실적 이익을 위해 가해자와 한 편이 될 때, 자식은 부모를 잃고 국민은 국가를 잃는다. 보호자를 잃은 국민은 종종 죽창을 들고 봉기하거나 타국을 떠도는 난민이 되기를 선택한다.


금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경영위기 때마다 은행과 금융기관이 이용자들의 돈을 돌려주지 않거나, 재정위기가 발생하면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를 통해 화폐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국가의 부채를 개인들에게 떠넘길 때, 개인은 더 이상 특정 국가가 발행한 화폐와 금융권 안에 머물려 하질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를 경험한 각국의 경제 난민들이, 중앙은행과 전통금융 시스템에 대항해 분산 네트워크를 이용한 비트코인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23년 현재 전 세계 거시 금융 환경 악화와 전통 금융의 위기가 커지자, 다시금 비트코인에 옮겨가는 돈이 늘어나고 있다. 비트코인 같이 근본 없는 자산은 끝내 침몰할 것이라는 많은 경제학자들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은 보트피플처럼 전통금융에서 비트코인으로의 이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시간을 견디는 최선의 방법은 죽창을 들고 직접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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