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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톱3' 주춧돌 현대차 포니…韓 자동차 부품 초석 마련했다

  • 송고 2023.05.19 10:45 | 수정 2023.05.19 10:51
  • EBN 박성호 기자 (psh@ebn.co.kr)

1975년 포드와 협상 결렬 뒤 독자 생산 결정

"우리나라 기계 공업 발전 위해 국산화 해야"

자동차 부품 국산화율 90% 달해…수출 초석


포니쿠페 복원 차량과 기념 촬영(왼쪽부터 김용화 부사장,피터슈라이어,이충구 전 현대차 사장, 호세무뇨스 사장, 장재훈 사장, 조르지오 발테리, 정의선 회장, 조르제토 주지아로, 루크 동케볼케 사장, 이상엽 부사장, 파브리치오 주지아로ⓒ현대차그룹

포니쿠페 복원 차량과 기념 촬영(왼쪽부터 김용화 부사장,피터슈라이어,이충구 전 현대차 사장, 호세무뇨스 사장, 장재훈 사장, 조르지오 발테리, 정의선 회장, 조르제토 주지아로, 루크 동케볼케 사장, 이상엽 부사장, 파브리치오 주지아로ⓒ현대차그룹

포니는 현대자동차그룹이 글로벌 자동차 '톱3'에 오를 수 있었던 주춧돌이자, 자동차 부품 국산화의 주역이다. 대한민국이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게 된 건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자동차공업보호법이 시행되면서 해외 선진 업체와 제휴를 맺고 부품을 공수 받아 자동차를 생산하게 된다.


그 시절 조립 생산은 국내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전기를 열었지만, 외국 기술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당시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최고 시속 200km/h를 넘는 스포츠카들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정주영 선대회장은 1940년부터 정비소를 운영하며 자동차의 구조와 기계적인 원리를 터득했다. 그는 독립을 맞이한 이후 현대자동차그룹의 뿌리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현대차는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적 필요와 정주영 선대회장의 비전이 맞물린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경제 발전에 맞춰 중장거리 운송량이 늘어나면서 철도 수송에 한계가 생기자 정부는 2차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해 고속도로 건설을 적극 추진했다. 현대자동차공업사에서 축적된 자본으로 설립된 현대건설은 국내 도로 확충의 상당 부분을 맡아 진행했는데, 이때 정주영 선대회장은 자동차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상했다.


한 나라의 국토를 인체에 비유하며 도로는 혈관과 같고 자동차는 그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다는 생각을 했던 정주영 선대회장은 자동차 회사 포드(FORD)가 한국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빠르게 움직였다. 경제 발전에 대한 비전은 물론 정비소 운영으로 자동차 지식에 해박한 정 선대 회장과 포드와의 제휴 협상이 빠르게 이뤄짐으로서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된 것이다.


이듬해 현대자동차는 울산에 조립공장을 짓고 영국 포드의 코티나(Cortina) 2세대 모델을 들여와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력으로 설립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자동차 회사가 공장을 짓고 조립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현대 코티나'는 경쟁 모델인 '신진 코로나(토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 생산한 차량)'보다 큰 차체와 넉넉한 출력으로 이목을 끌었지만, 곧 생각지 못한 문제에 부딪힌다. 다른 택시에 비해 코티나 택시 차량이 자주 고장이 난다는 것이었다. 승용차의 대부분이 영업용 차량으로 운영되던 시절인 만큼 큰 문제였다.


포드가 파견한 조사단은 난감한 결론을 내렸다. 고장 원인을 '차를 험하게 굴리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비포장도로에서 운행을 자제할 것'이라는 해결책을 내놨다. 코티나는 선진국의 도로 사정을 바탕으로 설계됐다. 당시 우리나라 도로 포장율은 20%정도였기 때문에 차가 멀쩡할 리 없었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나라에서 포드 조사단이 제시한 해결책은 자동차를 운행하지 말라라는 말과 같았다. 현대차는 포드에서 조립 모델을 들일 때마다 독자적으로 품질을 보강하며 현지화에 온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체 기술력 없이 외국 기업에 의존하는 조립 생산자의 한계를 느꼈다. 우리나라 땅에 맞는 자동차에 대한 바람은 점점 간절해졌다.


현대자동차는 단순한 조립을 넘어 독자 제조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제휴사인 포드와 새로운 합작사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주요 부품부터 자동차까지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에 포드의 생각이 바뀌는 사건이 생긴다.


중국 진출을 위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토요타의 행보에 따라, 범아시아 진출 계획을 세우고 있던 포드가 현대자동차와의 합작사 계약 이행을 계속 미룬 것이다.


자본금 납부가 늦어지는 데다 주요 부품을 국산화하기로 한 약속을 철회하려는 포드의 태도로 합작사 설립 협상이 1971년 결렬됐다. 선진 업체가 제시하는 불리한 조건에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이 거듭 실패하자, 이에 지친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대한민국 첫 대량 양산형 고유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 당시 국내 업체 입장에서는 선진 업체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생산한 자동차를 판매하는 것은 큰 투자 부담 없이 이윤을 내는 안정적인 사업 방안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모델을 갖고자 하는 현대차의 의지는 굳건했다.


우리나라 기계 공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생산이 100% 국산화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정주영 선대회장의 각별한 노력과 빠르고 담대한 결단으로 포니가 탄생한 것이다.


1975년 마침내 현대차의 첫 독자 모델 '포니(PONY)'가 시장에 출시된다. 현대차 설립 후 10년이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포드와 합작사 협상이 결렬된 후 독자적인 생산까지, 포니 프로젝트는 수많은 반대와 우려 속에서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자동차 산업은 다양한 소재와 가공 기술이 접목된 종합 산업이다. 정주영 선대회장은 자동차가 우리나라 기계 산업을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도전했다. 그가 전망한 대로 독자 모델 개발은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한 계기이자, 대한민국이 산업 강국으로 우뚝 서는 디딤돌이 된다.


포니 쿠페ⓒ현대차그룹

포니 쿠페ⓒ현대차그룹

포니의 주요 인기 요인 중 하나는 높은 부품 국산화율이다. 당시 조립방식으로 생산된 차는 자주 고장 났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부품이 수입품이어서 수리가 비싸고 오래 걸렸다. 반면 포니는 부품의 대부분을 국내 생산한 덕분에 수리가 빠르고 저렴했다. 또한 최신 시설에서 생산된 국산 부품을 통해 품질 수준이 향상되면서, 포드의 조립 생산자로서 낮은 내구성으로 비판받던 현대자동차의 품질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포니 부품 국산화의 진정한 의의는 국내 부품 업체 발굴과 계열화를 통해 국내 자동차 공업 발전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포니는 당시 국내 기술 수준으로는 제작이 어렵거나 시장성이 낮은 일부 품목만 수입에 의존했을 뿐, 90% 이상의 부품을 자체 제작하거나 국내 부품 업체를 통해 생산했다.


이를 위해 현대자동차는 포니 프로젝트 계획 단계부터 부품 국산화 관련 목표를 세우고, 국내 부품 업체 현황을 조사, 발굴, 육성하는 데 자체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완성차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전국 약 430개의 부품 업체를 발굴하고 계열화했다. 부품 업체는 포니 설계 도면에 따라 부품의 개발, 생산, 품질 검사를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은 외국에서 부품을 가져다 조립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 신차 개발 프로젝트였다.


이후 포니2의 경우 최대 98%의 국산화율을 달성하게 됐으며, 이와 같은 부품의 국산화 노력은 국내 자동차의 전후방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포니는 해외 수출을 목표로 개발된 차였다. 국내 첫 출고 시점보다 보름 정도 이른 1976년 2월 중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현대건설에 포니 15대를 시험 수출했는데, 이는 현대자동차의 수출에 대한 높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해 7월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포니와 포니 픽업은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에 1019대가 수출됐다.


이듬해인 1977년에는 7427대를 30개국에 수출했고, 1978년에는 1만 8317대를 40개국에 수출했다. 수출 지역도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으로 지속 확대됐다. 현대차의 수출 성과에 고무된 정부는 1979년에 자동차 산업을 10대 수출전략산업으로 선정한다. 이후 1982년 7월에 포니는 단일 차종으로는 국내 최초로 누적 생산 30만 대를 돌파했는데 당시 수출 대상국은 약 60개국에 달했다.


포니를 통해 해외 수출 시장의 길을 닦은 현대차는 1985년 전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그해 세계 각지에 포니, 스텔라, 포니 엑셀, 프레스토 등의 다양한 모델을 수출해 글로벌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듯 포니는 글로벌 시장에 수출되어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달리는 국기國旗'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현대차가 이후 다양한 라인업을 개발하고 수출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됐다.


현대차는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스마트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인류에게 자유롭고 혁신적인 이동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로보틱스, 도심 항공 모빌리티 등 미래 모빌리티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포니로 시작된 국가와 국민을 위한 도전 정신이 이제는 인류를 위한 진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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