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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별세] '한국 근대화'부터 '세계 제패'까지

  • 송고 2020.10.25 12:42 | 수정 2020.10.25 12:43
  • EBN 손병문 기자 (moon@ebn.co.kr)

"기술 식민지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단말기 갖는 시대 온다"

故 이건희 회장 ⓒ삼성

故 이건희 회장 ⓒ삼성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삼성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묵묵히 꿈을 현실로 변화시킨 이건희 회장의 약속을 만난다.


1987년 회장 취임과 더불어 선언된 그 약속은 당시 사람들에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지만, 세월 속에 하나씩 실현됐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채 못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386조원을 넘기면서 39배 늘었다.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커졌다.


삼성이 IT 산업의 모태인 반도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갈 수 있나?'


1974년 이건희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지금이야 반도체 하면 '삼성'을 떠올리는 시대지만 그 때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말도 안되는 공상과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반도체의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바통을 이었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추진했다.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갖는 시대가 온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


1995년 8월 마침내 애니콜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이건희 회장은 2000년 신년사를 통해 21세기 초일류 기업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또 한 번의 계기를 만들었다.


"새 천년이 시작되는 올해를 삼성 디지털 경영의 원년으로 삼는다. 제2의 신경영, 제2의 구조조정을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업구조, 경영 관점과 시스템, 조직 문화 등 경영 전 부문의 디지털화를 힘있게 추진하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먼저 변화의 흐름을 읽고 전략과 기회를 선점하는 것이다."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다.


"작년 중순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해 작년 말부터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밖에 잠이 안 왔습니다"(1993년 오사카 회의)


이건희 회장이 감지했던 위기가 닥쳐왔다.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글로벌 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 방문 중이었다. 이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양판점인 'Best Buy'를 돌아보다가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발견했다.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하라'고 했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어떻게 삼성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가"


삼성 제품이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건희 회장에게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다.


이를 본 이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을 선언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OECD 회원국에 가입한 1996년, 삼성은 연평균 17%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성장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을 때,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중이던 이건희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


이건희 회장의 질책과 함께 삼성은 내부 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경영 합리화와 사업재구축을 목표로 비상경영을 진행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지 1년 후인 1997년, 대한민국에는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외환위기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창출했다.


1957년 1월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 제도를 도입해 27명의 사원을 채용한 삼성은 1995년 한국 기업사에 대변혁을 가져 온 또 하나의 중대 발표를 한다. "삼성 공채, 학력제한 폐지, 학력 위주에서 실력 위주로"


세계가 무한 경쟁으로 가는 열린 시대를 맞아 이건희 회장은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전격 지시했다.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을 없애자.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고 실력이다." 이때부터 삼성은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실시했다.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전거 바퀴 두 개 가운데 하나를 빼 놓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1987년 취임 초부터 여성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회장은 여성들이 육아 부담 때문에 마음 놓고 일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어느 기업보다 앞서 어린이집 사업을 현실화 했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삼성은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한다."


또한 이 회장은 삼성 계열사들에게 "신뢰에 기반해 협력회사와 수평적이고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으라"고 주문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거래처, 납품업체, 하청업체'라는 말이 사라졌다. 대신 '협력업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건희 회장은 한발 더 나아가 1996년 신년사에서 "협력업체를 신경영의 동반자"로 정의했다. "협력업체는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신경영의 동반자다."


2011년 7월 6일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 발표를 앞두고 세계의 이목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의 국제 컨벤션 센터에 집중됐다.


IOC 총회장에 올림픽 찬가가 울리고 자크 로케 IOC 위원장이 "올림픽 개최지 선정에 도전한 모든 나라를 환영한다"고 입을 연 그는 "평창"을 외쳤다.


2009년의 시작과 함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선 이건희 회장은 1년 반 동안 170일간 해외 출장을 다니며 IOC 위원들을 만났다. 이 기간 이건희 회장이 평창 유치를 위해 전세계를 누빈 거리는 지구를 5바퀴 돌고도 남았다.


이건희 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올해를 그룹 전 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자."


2002년 4월 혁신적인 디자인의 휴대폰 'SGH-T100'이 출시됐다. 이 회장은 제품 개발 단계부터 꼼꼼히 디자인을 살폈다. 조가비 형태의 이 휴대폰은 '이건희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출시와 함께 큰 화제가 됐고 글로벌 1000만대 판매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2005년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 명품과 디자인의 격전지인 밀라노에 주요 사장들을 소집하고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로 평가하며 다시 한번 글로벌 초일류 수준으로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입니다.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


이 회장은 삼성의 '밀라노 4대 디자인 전략'도 발표했다. 독창적 디자인과 UI 아이덴티티 구축, 디자인 우수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 등으로 1996년에 이은 '제2 디자인 혁명'을 선언했다.


이듬해 출시된 와인잔 형상의 보르도TV는 2006년 한 해에만 300만대가 판매되며 세계 TV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우리는 지금 가슴 벅찬 미래를 향한 출발선상에 서있다. 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자" (이건희 회장, 1994)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1942~2020.10)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진 뒤 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성 측은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를 것”이라고 전했다. 유족으로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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