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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불신의 역사] ②1997년 외환위기 '국가부도의 날'

  • 입력 2020.09.16 08:56 | 수정 2020.09.16 09:07
  • EBN 김남희 기자 (nina@ebn.co.kr)

1997년 한국경제 비관한 외국자본, 달러 대규모 회수…환율 폭등

정부, 국제통화기금(IMF) 자금지원·감독 국가 경제 운영키로 결정

IMF, 한국에 대규모 구조조정·고금리 정책 등 선진제도 도입 요구

경제 개혁 및 국민 희생으로 국난 극복…계층 양극화·불평등 초래

1997년 12월3일 한국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구제금융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한국은 IMF가 요구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의 길로 들어섰다. 2020년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은 지 꼭 23년째가 되는 때다. 당시 상황을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 2018년 개봉하면서 외환위기 당시 정부 관료들의 미숙한 대응과 국민이 겪었던 고통이 새삼 주목받았다.ⓒCJ 엔터테인먼트1997년 12월3일 한국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구제금융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한국은 IMF가 요구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의 길로 들어섰다. 2020년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은 지 꼭 23년째가 되는 때다. 당시 상황을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 2018년 개봉하면서 외환위기 당시 정부 관료들의 미숙한 대응과 국민이 겪었던 고통이 새삼 주목받았다.ⓒCJ 엔터테인먼트


사건일지


"돈을 꿨으면 제때 갚아야지, 돈 갚는 날 미뤄줄 줄 알고 펑펑 쓰다가 이 꼴 났습니다. 각하"(영화 국가부도의 날, 김혜수의 대사)


"실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신경제를 내세우면서 세계 부자 대열에 끼었다고 자랑하던 게 엊그제인데 하루아침에 빚더미 삼류 국가로 전락했습니다"(1997년 11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권재홍 앵커의 오프닝 멘트)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다방면에 걸친 경제 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 이 담화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하에 운영됐다)




2018년 개봉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에 놓인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영화는 당시 암울한 시대를 마주한 4050 관객들과 공명하며 한국 사회를 뿌리째 뒤흔든 경제위기를 증언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외환위기 역시 한국의 급속 성장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1970~1980년대 한국이 당시 미국이나 유럽보다 빠르게 성장했던 탓에 매력적인 투자처로 꼽혔다. 결과적으로는 '빠른 성장'은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해외자본에 의존하게 했다.


특히 금융 산업에는 금융 시장 개방을 계기로 외국 자본이 크게 유입됐다. 금융사들은 이 자본을 빌려 사업을 확장해나갔고 기업이 발행한 어음을 매입했다. 그 어음을 발행한 기업이 부도(채무불이행)가 나자 그 어음을 사들인 금융사들도 동반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국제 통화인 달러가 부족해 자국의 화폐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외환위기를 겪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도 불안하다고 느껴 투자한 자본을 회수해갔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좋은 기업을 부도나게 한 다음 저가로 매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경제를 비관하며 자금을 대규모로 회수했고 환율은 폭등했다. 정부는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 부었으나 달러는 바닥을 드러냈다. 한국의 신용등급 하락을 막는 것도 역부족이였다.


그렇게 1997년 여름, 달러당 800원대 후반이던 환율이 11월 초엔 1000원을 돌파하고 만다. 얼마 후 그해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이미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상태로 곧 닥칠 국가 부도를 피하기 위한 최후의 선택지였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은 100억 달러 이하로 쪼그라들었고 해외 채권자에게 갚아야 하는 단기외채 규모만 250억 달러에 육박했다. 가진 돈보다 갚아야 할 돈이 더 많은 빚쟁이 신세로 전락했다.


IMF는 한국에 지원을 해주는 대신 여러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고금리 정책을 비롯해 기업 구조 조정과 공기업의 민영화, 선진자본 시장의 추가 개방, 기업의 인수 합병 간소화 등을 원했다.


정부의 수락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IMF의 관리와 감독을 받아 국가 경제를 운영하기로 약속해야만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정부와 방송사, 신문사로 "IMF가 무엇이냐"는 국민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IMF는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를 요구했다. 그것은 곧 기존 플레이어들의 희생이 필요하단 뜻이었다. 이듬해 매달 크고 작은 3000개의 기업이 도산했고 명예퇴직, 희망퇴직의 미명아래 실업자가 매달 1만 명씩 쏟아졌다. 일자리를 잃고 미처 가족에게 알리지 못해 가장들은 양복을 입은 채 등산을 하거나 거리를 배회했다.


그런 사람들의 퇴직금을 노리고 벌어진 사기도 난무했고 그 피해자는 자살하거나 파산에 처했다. 청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기업이 채용을 멈춘 탓에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청년들은 꿈과 소질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공무원, 교사 같은 안정적인 직업 찾기에 혈안이 됐다.


국민들의 위기 극복 의지는 뜨거웠다. 전국적인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에 있는 금을 모아 해외로 수출해 외환보유고를 늘린다는 취지였는데 자발적으로 아기 돌반지, 결혼반지를 가져온 국민들의 열기는 일제시대 때 선행된 국채보상운동을 떠올리게 했다.


외환위기 당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고 범국민적 희생이 컸던 만큼 IMF를 한국을 침탈하는 외세로 보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부 외화자금과장으로 정부대책 마련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사석에서 "외환위기 때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안타까워했다.


전문가들은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각해진 참사의 원인이 됐다”면서 “지난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비정규직이 급증하고 소득분배가 악화하는 등 양극화 현상이 본격화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EBN전문가들은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각해진 참사의 원인이 됐다”면서 “지난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비정규직이 급증하고 소득분배가 악화하는 등 양극화 현상이 본격화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EBN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지 2년만인 1999년 12월, 우리 정부는 더 이상 IMF로부터 자금을 빌려오지 않아도 됐다. 정부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아픔과 금융개혁의 성공으로 IMF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지만 다수는 국민들의 희생으로 회복한 경제 국난으로 기억한다.


외환위기의 찬 서리를 온몸으로 받아낸 것은 가계였기 때문이다. 많은 가장이 자살했고, 수많은 가정이 해체됐고 가장 대신 일터로 나선 주부와 학생들이 있었다. 이같은 희생을 발판삼아 한국경제는 다시 살아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정부는 독점 재벌의 해체, 공기업의 민영화, 부실기업 정리, 노동자 정리 해고의 간편화, 소비 촉진 등을 통해 경제 부흥을 유도하는 한편 경제 정책 개편과 규제 개혁을 이끌었다. 그 결과, 2001년 8월에 IMF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IMF 관리 체제를 예정보다 일찍 졸업할 수 있었다. 이로써 IMF 경제 위기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의 한국 사회는 많이 다른 사회가 됐다. 엄청난 정리해고와 뒤이은 비정규직법의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계층 간 소득 격차는 교육격차를 야기했고,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사회경제적 기반마저 취약해 졌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을 내재화한 시스템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일용직을 넘어 정규직과 중견기업, 대기업 종사자 등 노동의 계층화도 심화시켰다. 전문가들은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각해진 참사의 원인이 됐다"면서 "지난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비정규직이 급증하고 소득분배가 악화하는 등 양극화 현상이 본격화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법률적 평가


외환위기는 금융규제를 변화시켰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 경제 개발계획 아래 금융을 정책 뒷받침 수단으로 활용해 성공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에 반해 경직된 규제와 과도한 정책금융 등으로 인한 금융시장의 자율적 자금중개기능 및 효율성이 저하돼 온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는 관치금융 등에 따른 부실대출에서 온 대기업 연쇄부도와 금융당국 외환리스크 관리 실패를 이유로 1997년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 만큼 국제통화기금은 구제금융제공의 조건으로 우리에게 다양한 요구를 했는데 이를 위해선 법 제정과 개정이 필요했다.


우선 국제통화기금은 한국의 이자제한법의 철폐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기업 및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위해 일련의 금융 관계 법제 정비를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입법화된 금융관련 법제 정비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금융감독 및 중앙은행 제도 개편과 관련된 법제로는 첫째 ‘금융감독기구의 기구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를 근거법으로 국무총리 산하의 금융감독위원회(제3조, 지금의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 및 무자본 특수법인인 금융감독원(제24조)이 설립됐다.


이로 인해 업종별 금융감독기관을 통합한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통해 은행, 증권(증권회사, 투자신탁회사, 투자 자문회사, 선물회사 포함), 보험 뿐만 아니라 제2금융권인 종합금융회사, 상호신용금고, 신탁회사, 여신전문금융회사 등을 포함한 전반적 금융시장을 감독할 수 있게 됐다(제38조).


이와 함께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이하 ‘금산법’)에 의해 금융위원회가 금융산업 구조조정과 관련된 부실우려금융기관에 대한 다양한 시정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됐다(금산법 제10조 제3항).


두번째는 한국은행법이 개정됐다. 개정법에 통화신용정책의 수립 및 집행원칙을 명시하고(제3조, 제4조, 제6조),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개편(제12조, 제13조, 제15조), 한국은행의 은행감독기능 삭제와 함께 제한적이며 간접적인 은행감독기능(제87조, 제88조)으로 재정리됐다. 또 지급결제제도 운영 및 관리에 관한 사항(제81조)이 규정했다.


외환위기는 금융규제를 변화시켰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 경제 개발계획 아래 금융을 정책 뒷받침 수단으로 활용해 성공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에 반해 경직된 규제와 과도한 정책금융 등으로 인한 금융시장의 자율적 자금중개기능 및 효율성이 저하돼 온 것도 사실이다.ⓒEBN외환위기는 금융규제를 변화시켰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 경제 개발계획 아래 금융을 정책 뒷받침 수단으로 활용해 성공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에 반해 경직된 규제와 과도한 정책금융 등으로 인한 금융시장의 자율적 자금중개기능 및 효율성이 저하돼 온 것도 사실이다.ⓒEBN

세번째에는 금융산업 구조조정 관련 법령이 개정됐다. 먼저 ①금산법 개정(1차 98.4.1, 2차 98.9.14)을 통해 금산법의 적용대상인 부실금융기관의 범위를 예금자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범위로 확대하고(제2조), 부실금융기관에 대한 경영개선조치·명령의 내용 강화(제10조 제1내지 2항) 및 감자명령의 근거를 마련했다(제12조).


또 금융기관의 합병·감자절차 간소화(제5조 및 제5조의 2)와 적기 시정조치 대상기관의 확대 및 내용 강화 등(제10조 제1항)을 규정했다.


이어 ②예금자보호법을 개정(98.4.1)해 각 금융권별로 구분되던 예금보험기금을 예금보험공사로 하여금 통합관리하고(제2조), 예금자 보호를 위해 금융기관 지원, 부실금융기관 정리 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으며 예금자보험대상 및 한도를 확대했다.


이와 함께 ③금융기관 부실자산 등의 효율적 처리 및 성업공사의 설립에 관한 법률의 제정(1997.11.23)을 통해 기존 성업공사를 금융기관 부실자산 정리를 전담하는 성업공사로 개편하여 설립하고, 부실채권정리기금의 설치·운용을 규정했다.(성업공사란 한국산업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은 기업체중 채권회수가 곤란한 기업체를 관리하는 곳이다. 계속융자(투자)가 적합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기업체에 대한 산업은행의 채권과 채권의 변제를 받기 위해 인수한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설립된 공법인이다)


또 ④금융지주회사법(2000.11.24)의 제정으로 금융기관의 대형화·겸업화를 위한 금융지주회사의 설립 및 운영이 규정됐다.


이밖에 ⑤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법(2000.11)의 제정으로 구조조정대상기업이 발행하는 유가증권과 그에 대한 대출채권의 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Corporate Restructuring Vehicle, CRV)의 한시적 설립 및 운영을 규정했다.


금융기관과 금융거래의 정비도 이뤄졌다. 먼저 ①은행법의 개정(1999.4.1, 2000.4.22)을 통해 은행의 책임경영체제 강화를 위한 소유구조개편 및 사외이사제도를 개편했다.


또 동일인 여신한도의 기준이 되는 자기자본 비율을 BIS 기준에 따라 개편하고(제2조), 동일인 및 동일계열기업군에 대한 여신한도 및 거액여신의 기준 강화(제35조) 등 은행자산의 건전성 기준을 높였다. ②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의 제정(1998.4.1)을 통해 금융실명거래의 예외조항 신설(제3조) 및 비밀보장 강화(제4조) 등을 명시했다.


또한 ③여신전문금융업법의 제정(1998.1.1)을 통해 여신전문금융회사의 개별 근거법을 통합해 신용카드, 시설대여, 할부금융, 신기술사업금융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여신전문금융회사의 설립 및 규제완화를 규정했다.


아울러 ④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 개정(1998.4.1)을 통해 종금사의 건전성 규제강화의 내용과 새로운 내용의 자기자본 및 신용공여를 기준으로 한 여신금융회사로 전환을 시도했다.


  • 이지은 법률사무소 <리버티> 대표 변호사 / 김남희 EBN 기자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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