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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금융살롱] 자본시장의 '십자군' 금투업계

김남희 기자 (nina@ebn.co.kr)

등록 : 2017-12-05 10:36

▲ ⓒEBN 경제부 증권팀 김남희 기자
전쟁의 대명사 십자군(十字軍) 원정은 무려 2세기동안 약 10회에 걸친 전투다. '예루살렘 성지탈환’이라는 신앙심으로 비롯됐다. 그러나 200년 넘게 다양한 계층들이 전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제각기 다른 '사적 이익'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적지않다.

교황은 예루살렘 장악으로 교황권과 로마교회 강화를 꾀했고, 국왕과 결탁한 봉건영주는 새로운 영토 획득을 노렸다. 귀족들에게 빚을 진 농노들과 수감자들은 부채 청산과 면죄를 위해 전쟁터로 향했다.

처참한 현실보다 차라리 전쟁터가 낫다며 칼을 잡은 부랑자와 소외계층도 있었다. 더 많은 부를 쌓길 원했던 상단(商團)은 동방과의 교역확대로 ‘대박’의 기회를 꿈꿨다.

그렇다면 이들 중 가장 큰 실속을 챙긴 쪽은 어딜까.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상단을 주목하고 있다. 전쟁이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변질되면서 종교의 한계가 드러나 교황권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기사들과 농노들은 흩어지거나 소멸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날마다 새로운 기회를 목격했다. 전쟁터는 상인들에게 좋은 손익계산의 장(場)이 됐고 전쟁 물품 유통과 사업진출 통로가 매일 확장됐다.

▲ 2차 십자군 원정ⓒ위키피디아

전쟁 횟수가 많아질수록 이익을 챙기게 된 상단은 교역에 집중해 업력을 쌓았다. 이에 따라 지중해 교역로가 번창했고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해상공화국들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오늘날 사학자들의 분석이다.

서두부터 십자군 원정 애길 꺼낸 이유는 증권가에 불고 있는 초대형투자금융(IB)에 대한 사견(私見)을 풀어볼까 해서다. '1호 초대형IB(한국투자증권)'가 탄생해 첫 수신업무(어음발행)에 나섰고 후보기업들이 다음 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를 사활 건 공격으로 인식한 은행권의 견제 촌극을 보면서 기자는 목숨 걸고 원정에 나서는 십자군 상단이 마치 치열한 금융투자인들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성 안’에서 수수료 장사에 의존해온 은행은 팔짱을 끼고 기업을 심사했다. 인증도장 찍어주는 식의 영업에 길들여진 은행은 기업 역량보다 담보를 우선시하는 관행 속에서 금융서비스 정신을 쌓지 못했다.

특히 은행은 높은 연봉의 엘리트들이 포진해있는 항아리형 구조다. 그러면서도 은행은 '원정길'에 나서는 상단(증권사)에 “이슬람 지역(기업금융업)은 우리가 점찍은 곳이니 손대지 말라”는 식의 으름장을 놨다. 수년전 금융위가 초대형IB 제도를 공표할 당시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은행이다.

증권업의 생리는 ‘성 안’에 틀어박힌 은행과 전혀 다르다. 실리 계산에 능하고, 상권 확대를 찾아 길을 나서는 보부상이자 십자군 상단에 가깝다. 자금이 필요한 기업이면 어디든 달려가 ‘돈길’을 내는 개성상인과 같다.

증권사는 기업상장(IPO)을 주관해 수수료를 챙기고, 인수·합병(M&A) 시장을 주도한다.

여기서 쌓인 노하우에 초대형IB는 어음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조성한 수조원의 자금을 은행처럼 곳간에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베팅해 자금 숨통을 틔운다. '경제 마중물'이 되어 기업 생태계를 키운다는 게 초대형IB의 골자다. 수십년 쌓인 기업금융 내공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관계와 도전을 중시하는 상인정신이 금융투자업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대한민국 설계자들’ 이란 책에서 저자 김건우는 평안도의 상인 정신을 계승한 혈통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고 했다. 당시 변방으로 취급받는 평안도 상인 후예들은 기존 주자학에 의존하기보다 능동적인 20세기형 국가모델을 꿈꿨다고 한다. 이들의 정신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근간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초대형IB는 자금을 필요로 하는 기업고객을 능동적으로 찾아가는 21세기형 자본시장의 상단이다. 은행이 ‘성 안’에서 계산기만 두드릴 동안 증권사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새로운 교역길을 찾아나설 것이다.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금융투자인의 집념과 개척정신을 응원한다.
▲ 여의도 증권사가ⓒ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