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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아트+머니] 시간을 견뎌낸 작가, 위기를 극복한 기업

김남희 기자 (nina@ebn.co.kr)

등록 : 2017-11-16 06:00


"같은 단색화풍의 그림이라 해도, 이상하게 꼭 작품이 반품되는 작가가 있어요. 그 작가의 특징이라면 다른 작가에 비해 젊은 축에 속한다는 거죠. 유독 그 작가의 작품만 다시 팔아달라는 고객 요청이 집중되어요." 오랫만에 조우한 아트딜러 A는 미술 시장과 자신의 근황에 대해 얘기했다.

미술 시장에도 흐름이 있고 유행이 있다. 지난 몇년간 한국에 불었던 단색화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색과 구조를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서양 미니멀리즘과 같지만, 단색화는 자기수양과 명상을 통해 순수한 본질 가까이 다가서려 했다는 면에서 담백하면서도 풍부한 느낌을 준다.

특히 일상 속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현대인들의 예민함과 독소를 씻어준다는 면에서 단색화는 치유의 색채가 짙다. 감상자에게 어떠한 압력이나 감정 요동을 요구하지도 않는 단색화는 배려와 사유의 정신을 담아낸 화풍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단색화는 한국이 내놓은 독자적인 미술사조란 면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 왼쪽 그림=지난해 6월 김환기의 '무제 27-VII-72 #228'가 54억원에 낙찰, 국내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사진=K옥션

▲오른쪽 그림=서울옥션에서 추정가보다 18배 높게 팔린 박서보, 묘법 No.47-74.37.7 x 45 cm(8), 1974. 구매가 7296만원]ⓒ사진=서울옥션

작가마다 살아온 삶이 다르기에 단색화 작품 모두 개성적이다. 대표적으로는 정상화와 박서보, 이우환이 있다. 김환기는 추상화의 거장이지만 절제된 표현양식으로 깊은 세계관을 담아내 단색화 대열에 선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이들 4명 작가의 경매 낙찰액은 720억원으로 전체 낙찰총액(1720억원)의 42%를 차지하며 거래를 주도하고 있다. 코스피 시가총액 20%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가 우리 증시의 대장주 역할을 하는 것처럼.

시장을 주도하는 미술작품과 기업주식의 공통점에 대해 기자는 정체성이 명확하다는 점을 꼽는다. 또 시대가 원하는 것을 '시장의 언어'로 들려준다는 데 탁월하고 천재적인 선택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이뤄진 것처럼 여겨지는 신비함까지 담고 있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계산된 장치에 반감을 갖는다. 또한 독보적인 기업과 미술은 직관적으로 솟구쳐 나온 메시지를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거리낌없이 내보인다.

다시 아트딜러 A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는 고객이 반품하는 그림을 받아와 되팔아야 하는 불평을 털어놓으려 한 것이 아니다. A는 시간의 압력, 인고의 과정을 오롯이 견뎌낸 작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젊은 작가의 덜 숙성된 작품을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시간의 힘이 빚어낸 성숙한 작가의 그림이 감상자와의 관계가 오래 유지된다는 말을 했다.

시간은 흐르고, 장소는 움직이며 작가는 쇠락하거나 진화한다. 그리고 작품은 남는다. 작가의 그림은 작가가 견뎌낸 시간에 대한 기록이자 영혼의 단면이기에 그 작가가 살아온 궤적이 곧 그의 작품이라는 것이 A의 말이다.

미국의 한 인문학자의 연구결과가 인상적이다. 어떤 집단이든 중도포기율이 45%~50%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살아남는 자와 비례해 포기하는 자가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연구 결과다. 그렇다면 우리는 투자자 입장에서 살아남을 주식과 오래갈 작품을 선별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해 보인다.

독립운동가 글씨체를 1500여점 수집한 구본진 변호사도 같은 맥락의 조언을 했다.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남은(을) 작가를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증시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시간의 세례를 견디면서 나와 함께 성장할 기업을 찾아라." 이상에 가까운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기업들의 수명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밤새 사라지는 기업, 폭락하는 주식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똑같이 배정받는 하루 24시간. 지금 내 모습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일 24시간씩 소비한 시간이 모인 결과다. 이처럼 공평하고 신비로운 시간의 힘이 작가를 통해 작품으로 빚어지며, 기업을 통해 경영으로 펼쳐진다. 밀도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좋은 기업과 의미 있는 작품을 남기는 원동력이 아닐까.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항상 아쉬운 순간에 복기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