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과 밀가루 등 식품, 기름, 철강재 등…. 가격 인하 또는 안정을 위해 지난해 말부터 정부가 노골적으로 기업의 팔을 비틀고 있는 대표 품목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차원의 압박강도도 거세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가가 잡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제는 한국은행이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기존 3.5%에서 3.9%로 0.4%p 상향 조정했다. 하반기 들어 추가로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까지 터져나오고 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파열음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해당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의 불만도 이미 정점을 치닫고 있다. 정부에 대 놓고 불만을 토로하지 못한 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기업이 속으로 골병이 들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일부 기업들은 아예 용량을 줄인 신제품 출시 등 편법(?)이나 유통과정에서 물량DC 축소 등 눈에 띄지 않는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 사실상 제품 가격을 인상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 등을 동원한 정부의 고강도 압박과 원가 압박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선택한 기업의 고육책(苦肉策)으로 읽힌다.
물론, 최대한 제품 가격 인상을 막아 서민경제에 악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정부의 물가안정 대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생산자는 생산자대로,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양 쪽 모두에게서 불만이 넘쳐나고 있다.
왜 이 같은 엇박자와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걸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크게 물가안정에 대한 정부의 접근방식과 정책의 역방향성, 수동적인 태도 등을 꼽고 싶다.
우선, 정부의 물가안정 대책이 기업 생태계의 환경이나 구조적인 부분까지 면밀히 검토하고 이뤄졌는지 따져 묻고 싶다. 정책이 대통령의 한마디에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졸속 시행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즉, 해당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만 옥죄면 당장 물가안정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떨어질 것이라는 근시안적인 양약(洋藥) 처방에만 집중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실제로 정부의 압박이 가장 심했던 유통업체와 식품업체, 정유업체, 통신업체 등은 이미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가격 인하나 동결을 선언했거나 대책을 마련 중이다. 반면, 원자재 가격인상 폭이 상대적으로 컷던 철강업체는 가격인상 시기를 놓친 채 인상 폭과 시기를 저울질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 사이 산업계 전반의 누적 손실액은 수조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마디로 시장이 기능을 상실하고 엉망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정부는 힘에 의존한 기업 규제보다 시장의 가격논리를 존중해야 한다. 가격정책의 방향 역시 시장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물 흐르듯 흘러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원칙적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당장의 성과로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그래야만 시장의 가격이 균형을 이루고 우리 경제의 체질이 강화될 수 있다. 지금처럼 정부가 물가를 위해 ‘두더지잡기식’ 정책에 집중하다보면 분명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문제는 계속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유통업체를 타깃으로 삼다보면 그 압박은 완제품 제조업체를 거쳐 부품 납품업체로, 다시 하청업체로 연쇄반응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나친 가격 압박은 결국 제품 품질저하나 용량부족이라는 소비자 피해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다. 기업을 압박해 물가를 잡기보다 소비시장을 활성화해 균형 잡힌 가격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 정부가 해야 할 몫이다.
원자재 가격 급등이라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거스른 정책의 역방향성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자원 빈국으로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사불란한 제품가격 인상 억제라는 생뚱(?)맞은 정책 방향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루하루 치솟는 원자재 가격 급등에 중․장기적으로 버텨낼 기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가격인상은 이미 수급의 논리를 넘어 자원 무기화로 현실화되고 있다.
정부의 수동적인 역할은 더 큰 문제다. 유류세에서 보여준 정부의 이중적 태도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도 좀처럼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기업에는 ‘가격인하’를, 소비자에게는 ‘소비량을 줄여 고통을 분담하자’고 하면서도 정작 유류세 인하 문제는 아직까지 카드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난 12일 고유가대책 관련, 현안질문에 “두바이유가 배럴당 130달러를 넘어서면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겠다”는 정부의 물가안정 의지를 의심해 볼 수 있는 발언까지 나왔다. 하지만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130달러를 넘는 것은 최근 수급동향이나 석유수출국기구 움직임을 미뤄 볼 때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그 때까지 소비자와 업계는 피해를 감수하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게다가 올 들어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유류세가 지난해보다 1조원이나 더 걷혔다고 한다.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살이로 움츠러든 소비자들로서는 세금이 줄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오히려 더 많이 걷고도 나몰라라 한다니 허탈할 따름이다.
‘기업 프랜들리’, ‘기업하기 좋은 나라’, ‘규제 말뚝뽑기’ 등 다양한 친기업적 정책을 시행하던 이명박 정부 출범의 초기 아이덴티티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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