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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방화범 처결, 그리고 금화도감(禁火都監)

  • 송고 2008.02.12 14:08 | 수정 2008.02.12 23:28

임금이나 관리들은 화재가 나면 스스로 죄를 물었다

책임지는 풍토 만들기 숭례문이 죽어가면서 남긴 교훈

1426년(세종 8년) 2월 15일 한성부에 큰 불이 났다. 경시서(京市署)와 북쪽의 행랑, 중부·남부·동부의 인가들이 불에 탔다. 이때 재산과 인명 피해 정도가 막심했다. 경시서 및 북쪽의 행랑 106간이 불에 탔다. 중부의 인가 1630호와 남부의 350호 그리고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타 사라졌다.

인명피해는 정확히 파악되지도 않았다. 남자 9명, 여자가 23명 그리고 어린아이와 늙고 병든 사람이나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인명 피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6일에도 불은 계속되어 전옥서와 행랑 8간, 종루 동쪽의 인가 200여 호가 연소되었다.

21일에 이르러 방화가 계속되자 조정에서는 지붕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지키게 하거나 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군대까지 풀어서 잡아들이게 했다. 2월 25일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방화범에게는 반역에 준하는 처형과 같은 극형을 내려야한다고 간언했다, 세종은 이에 따르기로 한다. 이때 세종이 화재에 얼마나 혼이 났는지 3월 5일 도성에 화재가 났다는 말을 듣고 사냥도 보지 않고 환궁했다.

세종은 큰 불을 낸 방화범을 어떻게 했을까? 앞서 세종은 1423년 12월 6일, 방화범 김인단을 목 벤 적이 있다. 이송(李松)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훔쳐 내었기 때문이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성종 6년, 1475년 1월 9일) 2월의 화재가 그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세종은 방화범으로 의심할 만한 사람 십수명을 잡아서 죽였다. 이는 그 뒤에 방화를 저지르는 이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목적이었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방화범은 도끼나 칼로 목베어 죽였다.

세종이 형률에 꼭 따르지 않고 온건하게 사용하려 했지만 당시 방화범에게만은 매우 분노했던 모양이다. 2월 26일 세종은 이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소방방재청에 해당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 방화에 대비하는 법은 조직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과 방화자에 대한 처벌이다.

2005년 6월, 페루 남동부 안데스지역 마을 주민들은 방화 용의자 2명을 스스로 붙잡았는데 처벌도 스스로 했다. 방화범들을 기둥에 묶어 놓고 휘발유를 끼얹어 자체적으로 `화형 처벌´을 가했다고 한다. 지금 숭례문의 소실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의 마음은 이와 같지 않을까. 이번 방화범은 사형과 같은 극형에 처해지지는 않을 모양이다. 방화범에 대한 분노보다는 관계당국이나 책임자들에 대한 분노가 큰 듯싶다. 정치적인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없다.

1521년 (중종 16년) 8월 5일, 무기고의 화재가 일어나자 영의정 김전·좌의정 남곤이 사직을 청했다. 1600년(선조 33년) 12월 23일, 예조 판서 이정구가 악전(幄殿)에 불이 나자 스스로 대죄를 청했다. 1536년 (중종 31년) 9월 14일, 중종은 그달 12일에 일어난 불에 대해 스스로를 죄책 하는 교지를 내렸다.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듯 숭례문이 죽었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기 바쁘다. 600년 중요한 문화유산을 그 건물의 구조에 대한 무지로 전소시켰다. 이는 실용적인 지식만을 따져온 근대화의 성장론이 보여준 폐해의 일면이다. 하물며 그 책임지는 자세도 마찬가지라 이러한 면을 볼 때도 예전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과연 사회는 발전 진보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숭례문 화재 사건은 진보를 위한 걸음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숭례문이 죽어가면서 남긴 교훈이 아닌가. 퇴행적인 정치 공방으로 유야무야 끝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문화유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가 불에 타야 한다. 또한 문화에 대한 경제적 관점에서 벗어나 그자체로 관심과 힘을 실어주는 대한민국인의 인식과 국정운영이 필요하다.(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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