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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업 개척·혁신가 구자경 LG 명예회장 영면

아버지 구인회 창업주 부름에 교편 놓고 참여
45년 경영기간 매출 1150배 성장 이끌어
대기업 최초 무고 승계, "젊은세대 경영 맡아라"

윤병효 기자 (ybh4016@ebn.co.kr)

등록 : 2019-12-14 13:41

▲ 1987년 2월, 제26차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18대 회장에 추대된 구 명예회장(왼쪽)이 정주영 전임회장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고 구자경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초기이던 195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기업 경영에 전념하며 원칙 중심의 합리적 경영으로 LG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명예롭게 은퇴한 ‘참 경영인’이었다.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62세를 일기로 1969년 12월 31일 타계함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공장에서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키다 서울로 근무지가 바뀐 지 불과 1년 수 개월 만에 부친의 유고로 마음의 준비 없이 회장 자리에 오른 구 명예회장은 이후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나라 안팎의 어려운 경영환경을 극복하고, 화학 전자 산업 강국을 위한 도전과 21세기 선진 기업 경영을 위한 혁신의 시대를 펼쳤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일념으로 화학과 전자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

또 그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경영 혁신을 추진해 자율경영체제 확립, 고객가치 경영 도입, 민간기업 최초의 기업공개,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 현지공장 설립 등 기업 경영의 선진화를 주도한 혁신가였다.

구 명예회장이 25년 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고,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임종을 맞을 때까지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냈고, 인재 양성을 위한 공익활동에 헌신하는 열정으로 충만한 여생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자로의 업적은 물론 은퇴 후의 삶까지 재계의 귀감으로 존경을 받아 왔다.

슬하에 장남 고 구본무 LG 회장을 비롯해 구훤미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고문, 구미정씨, 구본식 LT그룹 회장 등 4남 2녀를 두었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지난 2008년 타계했다.

▲ 1999년 4월 LG디스플레이 구미공장을 방문한 구 명예회장.

■아버지 구인회 창업주 부름에 교편 놓고 사업 뛰어들어
구 명예회장은 LG그룹의 창업 초기부터 회사 운영에 합류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회사를 일궜다. 1970년 그룹 회장에 취임할 때까지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킨 연유로 한국의 2세 경영인 가운데 구 명예회장만큼 현장을 잘 알고 기술을 잘 이해하는 기업인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 명예회장이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교사로 근무 중이던 1947년, 부친이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일손이 모자라자 구 명예회장은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예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에 1950년 교편을 놓고 본격적으로 기업인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밤에는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아침 5시 반이면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하는 등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판자를 잇대어 벽을 만든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벽 사이로 모래바람이 들어와 자고 나면 온 몸이 모래투성이였고, 겨울에는 그 틈으로 찬바람이 쏟아져 슬리핑백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자야 했다. 잦은 모래바람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면 그 모습은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락희화학에서의 플라스틱 가공 경험은 훗날 금성사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플라스틱 가공에 필수적인 자체 금형 기술 확보와 인력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때 축적된 금형 역량을 바탕으로 라디오, 선풍기, 모터 등 당시로서는 높은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의 금형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흔히 경영수업이라고 하면 영업이나 기획, 해외지사에서 출발해 몇 년간 실무를 보다가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경영자로 나가는 것이 익숙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이에 반해 구 명예회장은 십 수년 공장 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장남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수 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구 명예회장이 여느 2세 경영인과는 달리 창업과 성장을 함께 주도한 1.5세대 경영인으로 평가 받는 이유도 그가 부친의 창업 초기부터 합류해 20년간 생산현장을 도맡으며 사업을 정착시켜 공고히 성장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 1999년 10월 LG화학 여수공장을 방문해 시설현황을 살피고 있는 구 명예회장.
■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으로 화학 전자산업 이끌어
구자경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으로 기술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어 우리나라 화학 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끈 경영자였다. 그가 열정을 쏟은 연구개발의 결과로 축적된 기술력 덕분에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과 사업 확장이 가능했고, 오늘날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화학 전자 산업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외쳐댈 때에도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치게 된다며 ‘강토소국 기술대국’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대부분의 연구실이 각 공장 별로 소규모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다. 이 곳에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외 우수 연구진을 초빙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가 집행되었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여기서는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하여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이어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같은 해인 19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고, 이곳에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 명예회장(왼쪽)이 고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고 있다.
■국내 최고 전자·화학사 발판 마련
구자경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최고의 가전 회사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당시를 회상하며 구 명예회장은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구미 공장을 비롯해 현재 LG의 국내 주요 생산거점이 되고 있는 전자 및 화학 분야의 수많은 공장을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75년 금성사 구미 TV생산공장에 이어 1976년에는 냉장고, 공조기, 세탁기, 엘리베이터, 컴프레서 등의 생산시설이 포함된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립했다. 창원공장 준공식 당시 구 명예회장은 “이 공장이 서고 보면 냉장고의 컴프레서 제품까지 완전 국산화될 것이고, 기종도 다양하게 개발하게 될 것이므로 전기 부문의 새로운 비약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1983년부터 1986년 말까지는 미래 첨단기술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구축하며 오늘날 전자 산업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화학분야에서는 1970년대 울산에 하이타이(가루비누), 화장비누, PVC(폴리염화비닐)파이프, DOP(프탈산디옥틸), 솔비톨 등 8개의 공장을 잇달아 건설하면서부터 종합 화학회사로의 발돋움을 본격화했다.

또 전남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PVC레진, ABS(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 납사(나프타) 분해공장 등을 구축해 정유(당시 호남정유)부터 석유화학 기초유분 및 합성수지까지 석유화학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럭키 여천공장 가동은 70년대까지 가공산업 위주였던 국내 화학산업을 석유화학 원료산업으로 전환하는 이정표로, 원료의 안정적인 수급이 중요한 석유화학 산업에서 수입에 의존하던 원료를 직접 생산하게 됨으로써 석유화학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늘어나는 제품 수요에 대응하고 전국적 제품 공급을 원활이 하기 위해 한반도의 중간지점인 충북 청주에 치약, 칫솔, 모노륨, 액체세제 등을 생산하는 생활용품 종합공장인 럭키 청주공장을 건설했다.

또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이 플라스틱 사업에 전념하고자 지난 1954년 완전히 철수했던 화장품 사업으로의 재 진출을 결정하고, 청주공장에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품 공장을 건설하여 창업 당시의 사업영역이던 화장품 사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한국종합화학의 나주 공장을 인수해 국제규모의 종합화학으로 커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수 당시의 시설을 몇 차례 개조하고 증설하여 옥탄올, 이소부탄올, 아크릴레이트 등 석유화학제품의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 2013년 7월 구 명예회장(오른쪽)이 LG연암문화재단 ‘연암해외연구교수 증서수여식’에서 선발된 교수와 악수를 나누며 격려하고 있다
■락희화학 민간기업 최초 상장…투명경영 선도
구자경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이제까지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대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할 수 있었고, LG는 세계의 중앙으로 활동 무대를 과감하게 확장시켰다.

대표적인 합작 사례로는 1966년부터 시작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 사와의 합작을 꼽을 수 있다. 50대 50의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했음에도 상생과 조화라는 합작의 기본을 존중하고, 원칙을 공정하게 지키면서 한치의 잡음 없이 합작경영을 이어왔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70년대 초반에 두 건의 화재 사고를 겪으면서 칼텍스에 대해 커다란 신뢰를 갖게 되었다. 71년 호남정유가 입주해있던 건물에 불이나 중요 서류가 타버렸을 때 칼텍스는 사본을 제공하며 복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72년 여수 공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는 칼텍스 측이 사전에 안전관리를 철저히 해둔 덕에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95년 대기업 최초 무고 승계…"젊은세대가 경영 맡아라"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으로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당시 WTO체제의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이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 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구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행운보다는 고통이, 순탄보다는 고난이 더 많았던 세월이었지만,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늘 곁에 있었기에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경영혁신에 자발적으로 동참해 준 임직원들의 저력과 노고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명과 감사로 간직하게 될 것”이라며,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이제 공인의 위치에서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되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서 무상감도 들지만,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은 감회 어린 이임사를 끝으로 임직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식장을 빠져 나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퇴진’을 단행했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되었다.

후에 구 명예회장은 지인들에게 당시 은퇴할 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섣달을 보내며 나름의 감회를 지니게 되지만 내게는 각별히 다른 의미가 하나 더해진다. 선친의 기일 역시 섣달 그믐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의 섣달그믐만큼은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마음속의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고 회고했다고 한다.